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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일상
아, 옛날이여 - 70년대 중반, 겨울 무의촌진료봉사
내가 대학을 입학할 75년도만 해도 무의촌이 상당히 많았다.
학교에는 당시 세개의 진료써클(지금은 동아리라고 한다.)이 있었는데 선배님들이 들어와 자기네
써클소개를 하는데, 교회에 열심인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C.D.S.A.(기독치과학생회)에 가입을 했다.
소개한 선배의 인상도 좋았지만 가운을 입고 치과의사인양 한번 과시하고 싶기도 했다.
예과 일년생이 의사폼을 잡는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첫 무의촌봉사하는 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진료박스들기(권유한 그친구하고),
물떠다주기, 청소학기, 쓰레기버리기, 환자머리를 뒤에서 잡아주기, 진료끝나면 기구정돈하기,
또 진료박스들기였다.
그 인상좋은 선배가(당시 회장) 내가 안타까웠던지 어떤 꼬마의 유치를 뽑아보라고 했다.
손으로만 뽑아도 되는 경우여서 굳이 기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선배가 걱정스러운 듯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심각하게 뽑았다.
그게 마치 맛보기였던 것처럼 한동안 나는 기구를 잡아보지 못하고 또 잡역담당만 했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진료는 좀 나았지만 하계봉사나 동계봉사는 정말 힘들었고,
내가 무슨 복에 이 원수같은 친구를 만나 이고생을 하나 생각하면 그 친구가 밉기도 했다.
(지금은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고 부천에서 개인치과를 차려 근무하고 있다.)
힘들다고 그만 둘 수도 없었다.(당시 1년 선배는 하늘이었고 동아리는 조폭수준이었다.)
예과 2년 동계봉사는 예산으로 갔었다.
우리 써클선배가 아직 학교에 수련의로 남지않은 상황이라 다른 써클선배가 지도치과의사로 같이 갔다.
7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어느 국민학교에서 진료를 하는데, 진료박스는 그 학교에서 준비한 차가 운반을 해준다고 해서
1년선배하고 또 다른 선배하고 셋이서 박스담당을 했다.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점차 발이 얼어왔다.
가만히 서있기가 힘이 들어 발을 동동굴리며 얼마쯤 있으니까 승용차가 아니고 트럭도 아닌 차가 오는데,
덮개도 안달린 픽업차였다.
한 선배는 홀랑 기사옆자리에 타고, 내 2년 선배(김종하)하고 나하고는 덮개도 없는 뒷자리에 올라타서
진료박스가 움직이지 않도록 양쪽에서 붙잡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추운 날씨에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옷속을 뚫고 들어왔다.
숨을 쉬기가 힘이 들고, 몸을 아무리 움켜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그 선배가 자기 외투단추를 푸르더니 나를 감싸는게 아닌가?
너무 감격했지만 말이 안나왔고, 나는 이때 선배는 이런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하형, 잘 계시죠?
길은 포장도 안되어 덜컹거리고 박스는 언 손으로 꼭 잡고 있어야했다. (이때의 고생은 비록 짧았지만
그후 군대에서 경험한 고생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겨우 초등학교에 도착해보니 선배들은 지글지글
끓고있는 조개탄난로옆에 모여 진료박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모여있었다.
진료준비고 뭐고없이 정신없이 난로옆에 다가가서 그야말로 잠깐 서있는데 뒤꼭지가 간지러우며
지도치과의사의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선배들은 준비하고 있는데, 후배들은 불이나 쬐고있고......”
그다음에도 뭐라 한 것같은데 여기까지의 말이 나를 너무 혼란스럽게 해서 들리지도 않았다.
‘다시는 내가 따라오나 봐라’ 다짐을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아무도 동정의 눈초리가 아닌 당연하다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다음해에 진료부차장이 되는 바람에 할 수없이 장기진료를 따라갔고, 또 추억거리가 생겼다.
학교에는 당시 세개의 진료써클(지금은 동아리라고 한다.)이 있었는데 선배님들이 들어와 자기네
써클소개를 하는데, 교회에 열심인 친구의 간곡한 권유로 C.D.S.A.(기독치과학생회)에 가입을 했다.
소개한 선배의 인상도 좋았지만 가운을 입고 치과의사인양 한번 과시하고 싶기도 했다.
예과 일년생이 의사폼을 잡는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첫 무의촌봉사하는 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진료박스들기(권유한 그친구하고),
물떠다주기, 청소학기, 쓰레기버리기, 환자머리를 뒤에서 잡아주기, 진료끝나면 기구정돈하기,
또 진료박스들기였다.
그 인상좋은 선배가(당시 회장) 내가 안타까웠던지 어떤 꼬마의 유치를 뽑아보라고 했다.
손으로만 뽑아도 되는 경우여서 굳이 기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선배가 걱정스러운 듯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심각하게 뽑았다.
그게 마치 맛보기였던 것처럼 한동안 나는 기구를 잡아보지 못하고 또 잡역담당만 했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진료는 좀 나았지만 하계봉사나 동계봉사는 정말 힘들었고,
내가 무슨 복에 이 원수같은 친구를 만나 이고생을 하나 생각하면 그 친구가 밉기도 했다.
(지금은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고 부천에서 개인치과를 차려 근무하고 있다.)
힘들다고 그만 둘 수도 없었다.(당시 1년 선배는 하늘이었고 동아리는 조폭수준이었다.)
예과 2년 동계봉사는 예산으로 갔었다.
우리 써클선배가 아직 학교에 수련의로 남지않은 상황이라 다른 써클선배가 지도치과의사로 같이 갔다.
76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어느 국민학교에서 진료를 하는데, 진료박스는 그 학교에서 준비한 차가 운반을 해준다고 해서
1년선배하고 또 다른 선배하고 셋이서 박스담당을 했다.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점차 발이 얼어왔다.
가만히 서있기가 힘이 들어 발을 동동굴리며 얼마쯤 있으니까 승용차가 아니고 트럭도 아닌 차가 오는데,
덮개도 안달린 픽업차였다.
한 선배는 홀랑 기사옆자리에 타고, 내 2년 선배(김종하)하고 나하고는 덮개도 없는 뒷자리에 올라타서
진료박스가 움직이지 않도록 양쪽에서 붙잡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추운 날씨에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옷속을 뚫고 들어왔다.
숨을 쉬기가 힘이 들고, 몸을 아무리 움켜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그 선배가 자기 외투단추를 푸르더니 나를 감싸는게 아닌가?
너무 감격했지만 말이 안나왔고, 나는 이때 선배는 이런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하형, 잘 계시죠?
길은 포장도 안되어 덜컹거리고 박스는 언 손으로 꼭 잡고 있어야했다. (이때의 고생은 비록 짧았지만
그후 군대에서 경험한 고생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겨우 초등학교에 도착해보니 선배들은 지글지글
끓고있는 조개탄난로옆에 모여 진료박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모여있었다.
진료준비고 뭐고없이 정신없이 난로옆에 다가가서 그야말로 잠깐 서있는데 뒤꼭지가 간지러우며
지도치과의사의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오는게 아닌가?
“선배들은 준비하고 있는데, 후배들은 불이나 쬐고있고......”
그다음에도 뭐라 한 것같은데 여기까지의 말이 나를 너무 혼란스럽게 해서 들리지도 않았다.
‘다시는 내가 따라오나 봐라’ 다짐을 하면서 준비를 하는데 아무도 동정의 눈초리가 아닌 당연하다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다음해에 진료부차장이 되는 바람에 할 수없이 장기진료를 따라갔고, 또 추억거리가 생겼다.